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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2제 : 서울위생병원 창업자 류재한(G.H.Rue)박사

 

 1929년5월 류제한(Rue. G. H, 로마린다의대 졸업)박사가 내한하여 순안병원장으로 봉직하다, 1931년 9월 서울 소공동에 2층집을 마련 진료하였고, 1931년11월에  인사동으로 또 이전하여 경성요양원(9병상)으로 개원하였으며, 1933년 4월  휘경동 배봉산 기슭에 1만 2 천평의 터전을 마련 1936년1월15일에 헌당식을 하였고 경성요양원(40병상)으로 개원하였다. 1936년 4월에는  부속 간호사 양성소를 개설하였다. 1937년1월 한국최초의 폐결핵 병동을 개원하였으며, 류 박사는 서울과 순안을 왕래하며 환자를  돌보았으며 1941년 일제탄압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7년 5월 류 박사가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병원이름을 서울위생병원으로 개칭 하였으며, 간호원 양성소를 간호전문학교로 승격시키었고 1947년 인턴을 모집하여 수련병원이 되었다.1948년 류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로 위촉되었으며  그 당시 본병원의 의료수준은 최고를 자랑했으며 재한 외국인 건강관리병원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1948년 말 유 박사의 故 메이 부인을 위한 기념교회당을  헌당하였다. 1950년 6. 21 대총회 참석차  미국에 있던 류 병원장은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속히 와달라는 전보를 받고  무초대사와 몇몇 인사들과 함께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로 급히 귀국하였다.  6.25 사변이 돌발  한 것이다.  류 박사가 맥아더 사령부에 요청  미국 L.S.T함대로  피난민 3000명을  인천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제주도 성산포로 피난시키었다. 부산 피난지에서  영부인 프란체스카여사의 권유로 피난환자를 돌보라는 권유를 받고  1951년 3월 부산 서구 부용동 경남도청  창고에서 서울병원 분원으로 피난환자들을  진료해 주었다. 그 분원이 훗날  부산위생병원의 되었다. 성산포에  임시병원을 개원하여 전염병환자들에게 무료치료를 베풀었다. 또 인근마을에 2-3명의 간호원을 파견하여 종두 예방 주사 등의 위생지원을 하였다. 또한 류 박사 부인 류은혜 여사가 1951년 9월 13일  병동에서 전쟁고아 13명으로 고아원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8월 3일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 200번지에 9800여평의 대지와  104평의 건물과 양계장, 양말 공장 등의 실업부와 2만 여평의 농장을 갖춘 훌륭한 사회사업기관으로 발전시켰다.

 

류제한 박사의 부인인 류은혜 여사가 초대 원장으로 취임 운영하다 1980년 8월 1일 해산 되었는데 그때까지 약 700여명의 고아들이 병원 부설 성혜삼육초등학교와 성혜중학교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며 성육원을 거쳐 해외에 입양된 아동의 총수는 467명이었다.1954년 3월 이 대통령은 류 박사에게 “대한민국 문화장”을 수여하였다.1959년 병원 앞 이왕직 땅 애기능 25만평을 샀다. 67년 퇴임후 미국에 거주하며 6차례 왕래하며 본 병원을 도왔다. 끝으로 류 박사의 어록을 인용하면 “나는 한국에 구경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라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근 32년간의 헌신봉사가 우리병원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